CAATINGA
부유감
2026.05.20

올해도 곧 반이 되어가는데 확실히 글을 너무 안올렸군
지난주말 한시즌 내내 시달렸던 작업을 마치고 졸업심사를 통과한 한편 2주전에는 알콜성 급성간염을 진단받고 평생금주 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천성이 우울한 사람이라 견디지 못하겠는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이런 내 성격 자체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술을 통해 도피하곤 했다. 도수 센 것만 좋아했고 그만큼 술이 세기도 했고. 취하는 게 좋았고 그러다 보니 맛도 좋아하게 됐다. 아직은 좆밥이라 가성비로 때우지만 좀더 나이든 힙두러로 진화하면 나름 고급스러운 술도 즐길 수 있겠거니, 더 나중에 가서는, 뭐가 잘돼서 인생이 잘 풀리면 아지트 술집을 열어보고 싶다… 그런 꿈을 가졌었고… 술을 마시면 아무리 슬픈 날에도 신이 날 수 있었고, 심지어 춤도 출 수 있었고, 맨정신은 커피를 통해 고양된 상태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지루하고 가혹한 곳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견딜 수 없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라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위스키랑 초콜릿을 사다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를 보는데 알고보니 귀여운 성탄절 롬콤이었다. 짝녀 앞에서 모자 소개나 하는 바보 같은 남자의 대사에 웃다 보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영화가 끝나고 자정이 되어갈 즈음 만취한 채로 밖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며 아무한테나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내 친우 휘난새의 최애 영화였다. 만취자의 오열과 생떼를 차분히 들어주던 그 우정의 목소리… 아마 다신 그날만큼 솔직할 수 없겠지.
한편 병원에 간 날 파트너가 옆에 있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알콜의존도가 심한 편이고 매일매일 마시는 수준이었는데도 나와 함께 얼마간은 금주하고 그 이후에도 절주하기로 시키지도 않은 다짐을 해 줬다. 내가 있으니 술 생각이 안 난다고도 하고. 망설임 없는 친절과 진심을 받을 때마다 흠칫하게 된다. 난 정말 내 인생에서 이런 걸 기대하지 않았었고 심지어 그게 내가 로맨틱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라면.
전에도 공개 일기를 두어번 쓰려고 했었지만 난 슬픔에 빠져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은 글은 아무래도 쓰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소외와 결핍을 말하자면 청산유수인데 좋은 소릴 하려니 밋밋하고 어색하다. 마치 행복의 세계에 갓 태어난 신생아 같다. 아 내 인생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기를 지나면서 술이 없다니. 그 언젠가는 이 부유감에서 패대기쳐질 날이 올 텐데.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지. 누가 그런 걸 신경 쓰겠어?

yunicorn